미국인들은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선호하는 편으로서, 미국인들이 소비하는 모든 와인의 75%가 미국산입니다. 한편 미국의 와이너리 수는 지난 20년 동안 배로 늘어나서 현재는 약 6000개의 와이너리가 존재합니다. 또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50개 주 전역에서 와인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와인산업은 약 400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레이프 에릭손은 북아메리카를 발견하여 그곳은 바인랜드(vineland)라고 명명했습니다. 사실 북아메리카에는 자생종 포도나무가 다른 대륙보다 많았습니다.
미국 초창기 와인
순례자들과 초기 개척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고 얼마 후부터 식사에 와인을 곁들여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황무지에서 자라고 있는 포도나무들을 발견했을 때 매우 기뻐했습니다. 검소하고 자립적이던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품종들(비티스 라브루스카)을 보고는 직접 와인을 만들 수 있겠다고 판단했고 비싼 유럽와인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생종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포도를 수확한 뒤 최초의 미국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빈티지의 풍미는 유럽의 포도로 빚은 와인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결국 유럽에서 비티스 비니페라 종 포도나무의 꺾꽂이용 가지를 주문하면서 수백 년 전부터 세계 최상급 와인을 만드는데 쓰여온 품종인 비티스 비니페라를 들여오게 되었습니다. 주문한 지 얼마 후 꺾꽂이용 어린 가지들을 실은 배가 도착하자 개척자들은 힘들게 번 귀한 돈으로 구입한 그 새 품종의 포도나무를 정성껏 심고 길렀습니다.
*초기 독일 이주민들은 리슬링 포도를 수입하여 자신들이 만든 와인을 호크라고 불렀고, 프랑스 인들은 부르고뉴나 보르도라고 지었습니다. 이탈리아 이주민들은 키안티라고 지었습니다.
그들이 정성껏 재배한 것이 비해 제대로 자란 나무는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시들시들하다 죽어버리고, 살아남은 나무도 열매를 거의 맺지 못했습니다. 조금 얻은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초기 개척자들은 추운 기후를 원인으로 생각했으나 현재 밝혀진 것에 따르면 유럽의 포도나무들이 신대륙의 식물병과 해충에 대한 면역성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식민지 개척자들이 해충과 질병에 대한 현재 방제법을 이용했더라면 비티스 비니페라 종 포도는 오늘날과 같이 잘 자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로 200년 동안 개량 없이 그대로 혹은 자생종과의 교배를 통해 비티스 비니페라 종을 정착시키려던 시도가 계속되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북동부 및 중서부의 재배자들은 달리 방법이 없자 다시 북아메리카 자생 포도나무인 비티스 라브루스카를 심으며 소규모 와인산업을 겨우 이어갔습니다.
*비티스 라브루스카는 미국 북동부와 중서부 모두에서 자생하는 품종으로 특유의 풍미가 있습니다. 이 포도는 마켓 판매용의 병에 든 포도주스를 만드는데도 쓰이며 라브루스카 종 포도로 만든 와인은 일명 여우향(foxy)이라 칭하는 포도 특유의 향이 더 짙은 편입니다.
미국에 와인산업을 정착시키려는 초창기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여기에 수입와인의 비싼 가격까지 더해지며 와이 수요가 줄어드는 결과고 이어졌습니다. 그 후 미국인들은 식사에 와인이 같이 나오는 경우는 특별한 날로 제한되었고 그들의 식탁에는 맥주와 위스키가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와인이 서부에 들어온 시기와 경위
서부의 와인 생산은 스페인 사람들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스페인 정착자들이 멕시코에서 북쪽으로 밀고 들어오면서부터 가톨릭교가 같이 따라왔고 선교관의 시대도 시작되었습니다. 초창기 선교회는 단순한 교회 이상으로서 남서부와 태평양에서의 스페인 식민지 주민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자급자족적 방어시설로 여겨지던 공동체였습니다. 이들 초창기 정착자들은 스스로 식량과 옷을 구하고만 들었을 뿐 아니라 와인도 직접 주조하였는데 와인은 주로 교회에서 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초기의 교회 의식에서 성찬식 와인은 특히 중요했습니다.
*초창기 선교사들은 캘리포니아의 서부 지역에 와이너리를 세웠습니다. 현재의 로스앤젤레스가 최초의 상업적 와이너리가 세워진 곳입니다.
와인에 대한 수요가 늘자 파드레 주니페로 세라는 1769년 비티스 비니페라 종 포도나무를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로 들여왔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이 포도나무는 온화한 기후 덕분에 잘 자랐습니다. 이로써 소규모이긴 하나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800년대 중반에는 양질의 와인 생산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계기가 된 두 사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두 번째는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경제 성장에 대한 포도재배의 중요성을 깨닫고 유럽에서 각종 포도나무 가지를 수입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양질의 와인을 생산해 냈고, 캘리포니아 와인 양조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필록세라의 발병
그 뒤에 미국 동해안이 원산지로 알려진 해충 필록세라가 유럽의 포도원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필록세라는 실험목적으로 수출된 미국 자생포도나무들의 가지에 붙어 들어오던 것이었는데 포도나무의 성장에 실로 파괴적이었습니다. 이후 20년간 필록세라는 유럽 와인 생산을 대폭 감소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캘리포니아가 세계에서 유럽종 포도로 와인을 생산하는 유일한 지역이 되면서 수요가 폭발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저렴한 와인과 고급와인을 모두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것을 증명해 내며 세계 와인 양조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도 필록세라가 들어왔고, 유럽처럼 초토화되기 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은 재정적 파탄을 맞이했습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미국 다른 지역에서 와인 생산이 차질 없이 되면서 미국의 와인 산업 자체가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금주법
1920년 미국의 수정헌법 제18조가 제정되어 미국의 와인산업에 또 한 차례 역경이 닥쳤습니다. 음주 목적으로는 주류를 제조, 판매, 운송, 수입, 수출, 배달,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13년간이나 시행된 이 금주법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번성해 가던 산업이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볼스테드법은 허점이 있었는데 성찬용 와인의 제조 및 판매는 허용되었고, 의사의 처방을 받으면 의료용으로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다시 정부가 개입하며 미국의 와인산업을 중단되고야 말았습니다. 미국의 금지법은 1933년에 폐지되었으나 그 영향은 그 뒤로도 수십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미국 와인의 르네상스
금주법 이후 테이블와인이 강화 와인보다 많이 팔렸던 1968년부터 살펴보면 당시 미국 와인은 향상되고 있는 중이었지만 소비자들은 여전히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만든 와인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1960-70년대 캘리포니아의 몇몇 와인메이커들은 뜻을 모아 유럽의 최상급 와인에 견줄 와인을 생산하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후 점차 와인 전문가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 와인메이커들은 꾸준히 제품의 질을 높여나가며 미국의 대량생산 와인들과 차별성을 부여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들의 와인을 유럽의 와인과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라벨을 포도 품종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이르러 포도 품종의 와인명이 미국 와인산업계의 표준이 되자 연방 정부는 라벨 규정을 수정했습니다.
현재 포도 품종을 와인명으로 쓰는 것은 미국의 최상급 와인이 표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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